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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석-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매년 4월 20일이 되면 국가는 유난히 다정해진다. ‘장애인의 날’이라는 이름 아래 곳곳에서 행사가 열리고, 장애가 있는 시민들은 동원된다. 이어 열렬한 축사가 낭독되고,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이 찍는다. 올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지방선거까지 두 달 남짓 남았으니 수많은 관공서는 저마다 기념식을 마련했고, 정부는 고급호텔 단상을 빌려 장애를 말했으며, 대통령은 각종 SNS에 익숙한 위로와 다짐을 구구절절 올렸다. 존중하겠다, 함께하겠다, 포용하겠다는 말의 성찬은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봄이 오면 화려한 벚꽃을 상찬하듯, 4월 20일이 오면 장애를, 차별철폐를, 권리를 당장이라도 이룰 듯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다음 날이 되면 국가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뭇없다.
문제는 그 다정함이 늘 하루짜리라는 데 있다. 국가는 장애를 권리의 문제로 다루지 않고, 기념의 소재로만 다룬다. 삶을 바꾸는 제도 대신 박수 받는 장면을 내놓고, 구조를 흔드는 개혁 대신 보기 좋은 상징을 이리저리 재배치한다. 그 상징의 대표적인 장면이 장애인콜택시 무료 운행 같은 이벤트다. 장애인의 날 하루쯤 무료로 탈 수 있게 해주는 조치는 언뜻 훈훈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훈훈함이 이 정책의 가장 얄팍한 부분일 수 있다는 점에는 둔감하다. 이동권은 선물일 수 없다. 그것은 권리다. 권리는 축하의 형식으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의무로 상시 보장돼야 한다.
생각해보면 이 무료라는 말은 묘하게 잔혹하다. 장애가 있는 시민이 매일 겪는 것은 요금의 부담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잡히지 않는 차량,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시간, 이용 자격을 둘러싼 촘촘한 제한, 지역마다 들쭉날쭉한 서비스,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교통 체계다. 그런데 국가는 그 구조적 결핍을 고치는 대신에 하루 요금을 면제해주며 생색을 낸다. 마치 오래 잠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열쇠는 주지 않고, 문고리를 하루만 반짝 닦아주는 일과 같다. 무료 운행은 그래서 호의가 아니라 은폐다. 국가가 매일 보장해야 할 권리를 하루의 이벤트로 축소하는 방식, 제도의 실패를 행사의 미소 뒤로 밀어 넣는 방식이다.
이것은 단순히 행정의 감각 부족이 아니다. 지금의 장애인정책이 서 있는 자리 전체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권리를 설계할 능력 대신 상징을 연출하는 기술, 책임을 이행할 의지 대신 기념을 관리하는 솜씨. 국가가 장애를 대하는 방식은 늘 비슷했다. 시설에서는 학대가 반복되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회는 잠시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는 대개 개인의 악행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색동원 같은 시설에서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충격이라고 놀란 척했지만 정작 더 깊이 물어야 할 것은 왜 장애가 있는 시민의 삶이 여전히 시설이라는 닫힌 구조 안에 오래 머물러 있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면 되레 난색이다. 폭력은 몇몇 나쁜 사람의 일탈로만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장애가 있는 시민을 보호의 이름으로 분리하고 통제해도 괜찮다고 여겨온 사회의 제도적 습관 속에서 무럭무럭 자란 탓이다. 시설은 건물만이 아니다. 시설은 국가가 책임을 미루는 방식이고, 사회가 불편한 존재를 시야 밖으로 정리하는 기술이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선거가 오면 장애가 있는 시민은 빠지지 않고 호출된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경청하고,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의사결정의 중심에는 여전히 장애가 있는 시민은 없다. 장애당사자 정치참여는 구호로 찬양되지만, 실제 권력의 자리에서는 번번이 밀려난다. 장애가 있는 시민은 정책의 생산자가 아니라 수혜자처럼 다뤄지고, 대표성은 실질이 아니라 장식처럼 소비될 뿐이다. 이 모순은 우연이 아니다. 권력을 나누지 않으면서 대표를 말하고, 참여를 보장하지 않으면서 포용을 말하는 정치의 오래된 못된 습성이다. 장애가 있는 시민은 선거마다 늘 초대되지만 배분받지 못하고, 호명되지만 배치되지 못한다. 그래서 장애인의 날은 우리 사회가 장애가 있는 시민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얼마나 쉽게 잊는지를 드러내는 날이다. 무대 위에서는 존엄이 말해지고, 무대 아래에서는 대기와 배제와 통제가 지속된다. 호텔에서 축사를 읽는 동안 누군가는 콜택시를 기다리고, 누군가는 여전히 시설에 갇혀 있고, 누군가는 정당의 문턱 밖에서 밀려난다. 국가는 기념식을 열지만 권리는 열지 않는다. 말은 넘치지만 구조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해마다 돌아오는 장애인의 날은 축하의 기념일이 아니라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을 측정하는 날에 가깝다.
이재명 정부가 정말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면, 달라져야 할 것은 언어가 아니라 방식이다. 더 따뜻한 메시지가 아니라 더 거친 현실을 바꾸는 제도가 필요하다. 장애인콜택시 하루 무료 같은 상징정치를 거두고, 상시적 이동권 보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시설 수용을 유지한 채 인권을 말하는 이중언어를 멈추고, 지역사회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예산과 지원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장애가 있는 시민을 정치의 명분으로 호출하지 말고, 공천과 의사결정 구조 안에 실질적으로 참여시키는 제도적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복지의 대상으로 호명하는 정치에서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정치로 이동해야 한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장애가 있는 시민을 단 하루, 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가 있는 시민이 매일 덜 배제되고, 덜 기다리고, 덜 참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정책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연출이다.
장애인의 날이 또 지나갔다. 남은 것은 꽃다발도, 축사도, 무료 탑승의 미담도 아니다.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질문. 국가는 정녕 장애가 있는 시민을 진심으로 기념했던가, 이 질문 앞에서 단 하루 장애인콜택시 무료 운행은 너무 사소하고, 고급호텔에 모여 요란하게 쳤던 박수소리는 공허할 뿐이다. 장애가 있는 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의 선의가 아니라 365일의 권리다. 그리고 정부가 증명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것뿐이다.
[더인디고 THE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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