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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필-
[더인디고 = 무필 집필위원] 장애인권리보장법이 마침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 10여 년간 장애계가 거리에서 복지라는 이름의 시혜를 넘어 권리라는 이름의 주권을 외쳐온 숙원이 법전에 새겨지는 역사적 순간이다. 그러나 통과된 법안의 면면을 뜯어보면 승리의 기쁨보다 서글픈 허탈함이 앞선다. 정부의 예산 보수주의와 야당의 원칙론 사이에서 여당이 선택한 길은 결국 정부의 가이드라인 수용이었고, 그 결과 장애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핵심 조항들은 대거 거세되었다. 10년의 투쟁이 고작 탈시설화라는 용어 하나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실리를 포기한 결과여서는 안 된다.
선언에 그친 장애 정의, 간판만 바꾼 권리보장원
이번 법안의 표면적 성과는 장애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제3조에서 장애를 개인의 결함이 아닌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하며 사회적 모델을 전면 수용했다. 또한 제11조(자기결정권), 제19조(탈시설화 등 자립생활 권리), 제26조(사법 접근권) 등을 통해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당당한 권리의 주체로 호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선언이 실제 삶으로 이어질 실행력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기존 한국장애인개발원을 개편해 설립한다는 한국장애인권리보장원은 이름만 거창할 뿐, 본질은 정부 사업의 위탁 집행기관인 개발원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권리 침해를 감시하고 옹호할 실질적 권한이 거세된 권리보장원은, 자칫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정적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이는 분명 낡은 체계를 허무는 나침반이 되기엔 역부족이다.
무엇이 버려졌나: 임의조항에 갇힌 장애인의 권리
더 뼈아픈 것은 축소와 삭제의 기록이다. 여당은 정부의 반대를 수용하며 장애계가 요구한 탈시설을 탈시설화로 수정했다. 탈시설이 시설 중심 사회의 완전한 종언을 뜻하는 인권의 언어라면, 탈시설화는 시설 환경 개선 등 행정적 편의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 과정의 언어일 뿐이다. 장애인 운동진영이 탈시설화라는 단어의 명문화를 당면 과제로 챙기는 사이, 국가 장애인 정책의 컨트롤타워가 될 대통령 직속 국가장애인위원회는 무산되었고 장애영향평가 대상 역시 축소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법안 전반을 지배하는 임의조항의 덫이다. 전문을 살펴보면 예산의 범위 안에서, 노력하여야 한다, 보조할 수 있다와 같은 문구들이 독소처럼 박혀 있다. 이는 국가의 책무를 선택의 영역으로 격하시킨다. 장애인의 권리는 국가의 형편에 따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임의의 것이 될 수 없다. 여당은 권리를 명문화했다고 생색내지만, 정작 그 권리를 뒷받침할 예산 강제성과 실행력을 기획재정부의 논리에 헌납하며 사실상 권리는 주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껍데기만 남은 권리는 권리가 아니다.
임의를 의무로 바꾸는 장애인서비스법 제정이라는 시대적 사명
본회의를 통과한 권리보장법이 방향을 선언하는 나침반이라면, 이제는 그 길을 실제로 달릴 엔진을 만드는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이번 법안의 임의조항들이 만든 구멍을 메우기 위해, 기존 장애인복지법을 전면 개정하여 당사자의 권리를 예산보다 우선하는 장애인서비스법으로 재편하는 것이 우리의 남겨진 숙제다.
이 새로운 실행법은 의학적 판정 체계를 탈피하여 개인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장벽과 욕구를 중심으로 서비스 판정 시스템을 재설계해야 한다. 예산의 논리에 갇혀 노력의 영역에 머물던 활동지원을 당사자의 필요에 따른 24시간 지원으로 의무화하고, 단순한 퇴소를 넘어 지역사회 내 지원 주택(Supportive Housing)과 자립생활 지원 인력이 결합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주거 서비스 전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이 핵심 과제의 본질이다.
서비스법 제정마저 실패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2보 후퇴다
장애계는 지난 10년의 요구를 탈시설화라는 용어 하나와 맞바꾸고, 간판만 바꾼 권리보장원을 성과로 챙기며 실질적인 권리들의 유예를 묵인한 것은 아닌지 뼈아픈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상징적 승리에 취해 실리를 놓친 타협은 결국 현장의 장애인들에게 또 다른 기다림을 강요할 뿐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하나다. 본회의를 통과한 이 불완전한 권리보장법을 근거 삼아, 장애인의 구체적 일상을 바꿀 장애인서비스법을 쟁취해내는 것이다. 이 과제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기존 복지법의 틀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이번 법안 통과는 1보 전진을 가장한 처참한 2보 후퇴로 기록될 것이다. 권리는 결코 임의적일 수 없다. 국회, 특히 법안을 주도한 여당이 외면한 예산 의무와 실행력을 서비스법이라는 그릇에 반드시 담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법안 통과는 여당의 장애인 권리 역사에 남을 치명적인 실책이 될 것이다.
10년의 투쟁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마지막 과제는 이제 서비스법의 완전한 의무화에 달려 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박제된 권리가 아닌 일상의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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