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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인디고-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을 맞은 지금, 인공지능(AI)은 다시 장애인의 정보접근 환경을 바꾸는 새로운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정부 역시 AI를 국가 핵심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으며, 오는 6월 열리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 20주년 당사국회의에서도 ‘포용적 AI’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전망이다. 하지만 기술 발전의 속도와 달리 장애인의 디지털 접근 현실은 여전히 복잡하다. 그러나 기술 발전 속도와 달리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디지털 취약계층은 여전히 정보 접근의 사각지대와 구조적 장벽을 경험하고 있다. 특히 한국이 2024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시각장애인·저시력자·고령자 등 화면 중심 인터페이스에 어려움을 겪는 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다.
더인디고는 박두성 선생의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을 맞아 개발자, 보조공학 전문가, 시각장애인 당사자, 정책·글로벌 IT 전문가들과 함께 ‘AI 시대 시각장애인의 접근성’을 진단했다. 이들은 “접근성은 단순한 편의 기능이 아니라, 누구도 기술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한 사회적 권리”라고 입을 모았다. – 편집자 주-
■ “기존 모바일은 자신의 주인을 모른다”
지난 8일 서울 가산동 장애인 보조공학기기 전문기업인 MVI(구. 강한손)의 서울 사무소. 김용태 MVI 대표와 하성준 이사, 서인환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정책위원장, 권찬 전 마이크로소프트(MS) 사회공헌 담당 이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대화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AI가 이렇게 발전했는데, 왜 아직도 시각장애인 전용기기가 필요한가.”
화제는 자연스럽게 MVI가 개발한 AI 기반 시각장애인 전용 스마트 단말 ‘엠블루(M-BLUE)’로 이어졌다. M-BLUE는 2023년 개발 이후 한국지능사회정보원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보조기기로 등록됐으며, 지난해 약 1200대가 보급됐다.
M-BLUE는 이름에도 철학을 담고 있다. Blind(시각장애인), Low vision(저시력), Universal Design(유니버설 디자인), Elderly(고령층)의 약자다. 단순 스마트폰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디지털 취약계층을 중심에 두고 설계한 접근성 기기라는 의미다.
질문이 이어지자 김용태 대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엠블루를 설명했다.
김 대표는 시각장애인도 물론 아이폰이 등 일반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기기는 기본적으로 화면 중심으로 설계된 기기다.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은 화면낭독기를 통해 어렵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특히, 기존 모바일 인터페이스는 탭, 스와이프, 포커스 이동 등 ‘화면을 보며 조작하는 방식’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어, 중도실명자, 저시력 혹은 시니어들 에게는 높은 장벽이 된다”고 설명했다.
반면 “엠블루는 처음부터 음성 중심 UX를 기반으로 설계했다”면서, “전화와 문자, 문서 읽기(OCR), 객체 인식, 환경 설명, 녹음, AI 음성 비서 기능 등을 하나의 기기에 통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시각장애인들은 OCR(광학문자 인식) 기기, 녹음기, 음성기기 등을 따로 들고 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M-BLUE는 시각장애인의 일상 속 동반자이자 나침반 같은 기기를 목표로 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김 대표는 ‘E(Elderly)’에 대해 “단순한 시장 확장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중도실명자의 상당수가 황반변성·녹내장 등 노화와 연결된 질환에서 출발한다. 시력 저하와 디지털 격차가 동시에 진행되는 사용자에게는 시각장애인용 인터페이스와 고령자용 인터페이스가 실은 거의 같은 설계 원칙을 공유한다”는 설명이다.
대담 시작부터 전문용어 등이 등장하자 시각장애인 당사자인 서인환 정책위원장은 이를 보다 쉽게 설명했다.
서 위원장은 “기존 모바일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반면 엠블루와 같은 전용 보조기기들은 사용자가 시각 혹은 청각장애인인지, 고령자인지 전제로 설계된 기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 “AI가 세상을 읽어줘도, 시각장애인에겐 여전히 ‘중간 도구’가 필요”
참석자들은 생성형 AI가 발전했음에도 시각장애인의 실제 접근 환경에는 여전히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하성준(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총장) MVI 이사는 이에 대해 “시각장애인이 카메라로 주변 환경을 촬영해 AI에게 설명을 요청한다고 해도, 어디를 찍어야 하는지, 초점이 맞았는지 스스로 확인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설명 속도나 정확성도 실제 생활에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AI가 있다고 해서 접근성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시각장애인 당사자이다 보니 실제 생활 속 사례들도 쏟아냈다.
하 이사는 “편의점 직원의 센스로 신라면과 짜장라면을 각각 봉지에 담을 때까지는 좋았는데, 집에 와서는 어느 봉지에 뭐가 들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엠블루 카메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어 “약 포장도 마찬가지다. 점자가 있어도 아주 기본 정보만 제공되는 경우가 많고, 점자를 모르는 시각장애인도 많다”고 말했다.
서 위원장은 집안의 조명, 냉난방, 도어락 등을 콘트롤 하는 ‘터치패널 홈패드(월패드)’를 예로 들었다.
그는 “난방을 위해 보일러를 작동하고 싶지만, 터치 방식으로는 알 수가 없어 대충 누른 다음에 보일러실로 이동해 작동하면 ‘됐구나’하는 것이 일상이었다”면서 “모바일폰의 카메라를 통해 조작 버튼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음성 인터페이스 기기와의 연결, 아니면 점자 커버라도 있지 않으면 적합한 작동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문제는 시각장애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키오스크와 월패드 앞에서 막막해하는 어르신들이 호소하는 어려움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를 보는 시대지만, 시각장애인이 AI만으로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전제한 뒤 “렌즈 초점이 정확히 맞았는지, 화면 속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색 옷을 입고 있는지 등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중간 도구가 필요하다. 엠블루가 그런 역할을 하는 보조기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누가 인생 걸고 개발하겠나”… 보조공학 산업의 현실
이날 대담에서는 국내 보조공학 산업의 현실적인 어려움도 이어졌다.
김용태 대표는 “보조공학은 장애 특성에 맞춰 세밀하게 접근해야 하지만, 그렇게 세분화할수록 경제성 확보가 어려워지는 구조”라고 말했다. 대량생산 대량 공급 등 경제성을 따지는 기업에서 과연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기기 개발에 나서겠냐는 설명이다. 심지어 보조기기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 대표는 일반 앱과 운영체제(OS) 변화에 대응하는 부담도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당연히 안드로이드, 애플, MS 중심 환경에 맞춰 개발한다”며 “보조공학 기업 입장에서는 해마다 바뀌는 운영체제와 앱 환경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라고 토로했다.
권찬 전 MS 이사는 “정부가 보조공학 개발을 장려하고 지원도 하지만 문제는 개발 이후”라고 지적했다. 권 이사는 “사용자는 내가 구입한 기기가 앞으로도 계속 업데이트되고 유지될지를 고민하기 마련이고, 그 부담은 대부분 개발기업이 떠안는다”면서, “문제는 MVI 등 사회적 기업이나 보조공학 업체들은 이 부분 쉽지 않다 보니, 자신의 인생을 걸고 보조공학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나 공공기관 등이 개발만 권장할 것이 아니라 이후 프로세스 등에도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관련해, 김 대표는 AI 기반 보조기기의 제도적 한계와 인식에 대한 어려움도 언급했다.
김 대표는 “엠블루는 본질적으로 보조공학 기기지만, 통신 기능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일반 모바일기기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데다, 기존 보조공학 정책이 이동·지체 중심으로 발전하다 보니, 보조공학 심사위원 등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할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감각장애 기반 AI 보조기기는 여전히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이어 “접근성은 단순 복지가 아니라 AI 산업과 디지털 포용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R&D부터 실증, 유지보수까지 연결되는 장기 생태계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참석자들은 “AI 접근성은 단순 편의 기능이 아니라 디지털 시민권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AI 시대의 격차는 단순 기술 격차가 아니라, 누가 정보에 접근하고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라는 의미이다.
■ “보조공학, 작은 시장이 아니라 삶의 변화”… 김용태 대표와 MVI의 9년
김용태 대표는 군 장교 전역 후 시각장애인용 점자정보단말기 ‘한소네’를 개발한 힘스코리아(현 셀바스코리아)에 입사하며 시각장애인 보조공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2017년 시각장애인 보조공학 전문 사회적 벤처기업 ‘강한손’을 창업했고, 현재의 MVI로 이어졌다.
그는 “시장 규모만 보면 결코 큰 산업은 아니지만, 기술 하나가 누군가의 삶을 실제로 바꾸는 경험을 현장에서 체득해 왔다”고 말했다.
현재 MVI 직원 24명 가운데 6명은 시각장애인이다. 서울 사무소 기술지원팀에도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이 직접 상담과 교육, 버그 대응, 홍보 업무 등에 참여하고 있다.
김 대표는 “당사자의 요구를 가장 잘 아는 건 결국 당사자”라며 “접근성 역시 사용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며, “MVI가 지난 9년간 일관되게 지켜온 원칙은 사용자의 부족을 보충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용자의 일상에 함께 머무는 동반자로서의 기기를 설계해 왔다”고 강조했다.
■ “AI 시대, 누구도 기술에서 배제되지 않아야”
참석자들은 AI 시대일수록 접근성 논의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권찬 전 이사는 벨(Alexander Graham Bell)의 어머니와 아내가 청각장애인이었다는 사례를 언급하며 “전화기 역시 청각장애인 교육과 소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기술”이라며 “음성인식과 TTS(Text-to-Speech) 기술 역시 처음에는 장애인의 필요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모두가 사용하는 범용 기술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미래 기술은 결국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의 필요에서 출발해 보편 기술로 확장되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와 사회가 보조공학 산업에 더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김용태 대표는 “AI 시대에도 접근성은 기능 몇 개를 추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설계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술은 결국 모두를 위한 기술로 확장된다”며 “정부와 기업, 사회가 접근성을 미래 기술과 산업의 관점에서 함께 고민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담이 끝날 무렵, 서인환 위원장이 “박두성 선생이 이 시대에 살아계셨으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라고 질문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시각장애인이 ‘글자’를 알면 세상이 보이듯, AI를 쓰면 수많은 장벽으로부터 해방되지 않겠냐”고 답했다.
시각장애인이 글자를 배우기 위해 점자가 필요했듯, AI 시대에도 접근가능한 기기와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혔다.
1926년 훈맹정음이 시각장애인에게 ‘글을 통한 세상’을 열었다면, 2026년 AI 접근성 기술은 또 다른 정보 접근의 전환점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기술 발전만으로 접근성이 완성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AI 시대의 진짜 질문은 얼마나 빠르게 기술이 발전하느냐가 아니라, 그 기술에서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모바일도 보조기기다.”
김용태 대표의 말처럼, 접근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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